팔레스타인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놓여진 1516년 이래 팔레스타인 지역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주민들은 이슬람 지배 하에 팔레스타인보다 넓은 의미의 아랍인이라는 범주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세금만 잘 내면 어느 정도 종교 종파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크리스트교도들에 의해 학대와 차별을 받아오던 유태교인들이 이 지역에 피난처를 만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 즈음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전 세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망을 가지고 도처로 뻗어나갔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1881년에는 튀니지를 점령했다. 이에 뒤질세라 영국은 1882년에 이집트를 점령한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오스만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오스만제국은 이미 노쇠한 제국이었다. 이를 간파한 프랑스와 영국이 호시탐탐 팔레스타인 지역을 노렸음은 자명하다.
1880년대 러시아에서 유태인 학살의 광풍이 불었다. 이후 로스차일드는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청년들을 보내 약 20여 개의 정착촌을 건설한다. 로스차일드 집안은 서구에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태계 거물급 자본가 집안이다. 이들에게 있어 유태인 구출과 식민지 건설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팔레스타인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그의 손에 팔레스타인으로 넘어온 유태인들은 현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을 저임금에 고용하면서 과수원이나 농장을 확대해 나가며 식민제국주의자들의 이익에 부합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팔레스타인으로 넘어간 자들이 주로 동유럽의 유태인들이라는 것이다. 서유럽의 유태인들은 북미 유태인들의 자본을 받아 동유럽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내려보내는 역할을 했다.
1894년 유태계 프랑스 장교인 알프레드 드레이퓌스 Alfred Dreyfus 가 반유태주의자인 동료들의 계략에 의해 독일에 군사기밀을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쓰고 재판정에 섰고 카리브해의 한 섬으로 유배를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후에 그가 무죄임이 입증된다. 이 사건을 목격한 헝가리계 오스트리아인 시어도어 헤르첼 Theodor Herzl 은 시오니스트 운동에 전력을 다 하겠다 다짐하게 되고 유태인 국가 건설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게 된다. 그 자신도 유태인인 헤르첼은 이전부터 유태인을 위한 피난처를 만드는 일에 관심을 놓지 않았었다.
그렇게 탄생한 시오니스트 정치 단체가 1897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제 1차 세계 시오니스트 회의이다. 이 단체는 유태인의 홈랜드를 팔레스타인에 만들겠다고 천명하는데 'Homeland'라는 애매한 단어를 쓴 이유는 제국열강들의 반발을 우려해서다. 자신들만의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명백한 목표가 있음에도 주변 열강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미움받지 않으려는 계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아시아의 경계에서 유럽 열강들의 첨병 및 방벽 역할을 하는 댓가로 유대국가 건설을 지원해 줄 것을 열강에 요청하게 된다. 이런 거래로 당시 지역을 관할하던 영국은 시오니스트 기구에 그들의 국가 건설을 실현하게 해주겠다 약속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발포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 이다. 이 선언으로 평화롭던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 선언 당시 많은 유럽의 유태인들은 심드렁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친구들은 헤르첼에게 '차라리 요양이나 하러 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중유럽, 동유럽의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보다 그들이 이미 살고 있는 나라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살거나 서유럽으로 이민가는 것을 오히려 원했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2차대전을 일으켜 대학살을 벌이기 전 까지는 말이다.
Sources
パレスチナ, 広河隆一, 岩波新書, 2002 (일어)
Israel, parlons-en!, Michel Collon, Investig'action-Couleur livres, 2011 (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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