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Diary 끄적임

헬싱키, 상트페테르부르그 그리고 조성진

Demain les chats 2018. 12. 18. 05:54

10일간 집을 비웠다.

헬싱키에서 열리는 조성진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공연을 보기 위해 공연일인 13일을 전후로 10일동안 핀란드 헬싱키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그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헬싱키에선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상트에선 발레로, 문화생활 가득했던 여행이었다. 체류 내내 잿빛 하늘에 눈발도 흩날렸지만 늘 날씨가 좋을 수만은 없는 법이니 맘 비우고 그러려니 했다. 짧은 여행의 여행기는 잘 쓰지 않음에도 뭔가 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고 싶은 충동에 기억이 증발되기 전에 글로 남겨본다.



# 맛도 멋도 없는 무색무취의 헬싱키


반박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나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느낀 나만의 소감임을 알려둔다.  지금껏 여행을 하면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한 경우가 한 손에 꼽는데 첫째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둘째가 모로코, 그리고 이번에 헬싱키가 추가되었다. 이 도시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볼 것도 할 것도 먹을 것도 아무 것도 없는 밋밋한 도시다. 디자인시티라고 하도 말을 많이 들어서 은근 기대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충족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녹아내려 버렸다. 디자인은 중구난방 통일성이 없고 불쑥불쑥 퓨쳐리즘 범벅을 한 생뚱맞은 건물이 우두커니 서 있거나 허허벌판에 부자연스러운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 등 나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부조화 일색이었다. 디자인은 있지만 통일성도 하모니도 없다. 뭔가 그들의 머리속에 디자인 도시의 일원으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증이라도 있는 듯 너도나도 앞다투어 새것 만들기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핀란드 음식을 맛보고자 식당을 찾아가도 가는 곳마다 예약을 안 했다고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고...아니 대체 하루 이틀 있다 가는 관광객이 뭘 어찌 알고 예약을 한단 말임? 아마 현지인만 받으려는 수작인지도 모르겠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있긴 했지만 너무 짧았고) 다시 가겠냐 묻는다면 뒤도 안 보고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최악의 관광지 후보다. 그냥 지금처럼 핀에어 경유지로 지리적 역할에만 충실하기를.



# 러시아는 모스크바지


이미 3년 전에 한 달 여행을 했었다. 무르만스크에서 바이칼호수까지 여기저기서 진짜 러시아를 느꼈다. 이번엔 상트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화한 도시라더니 역시나 그랬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 취향은 모스크바다. 강렬한 구소련의 유물이 도시 전반에 깔려있는 진짜 러시아를 선호한다. 상트는 러시아의 투박함에 제국주의 유럽의 화장을 덧칠한 곳이다.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내 취향은 아니라는 점. 그럼에도 이번 상트여행이 좋았던 이유는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로서 러시아는 참 매력있는 나라다. 물가도 싸고 안전하고 이색적이며 음식도 맛있다. 볼 것도 할 것도 많다. 핀란드와 상반된 나라로다.



# 조성진 그리고 아쉬움


나는 라흐마니노프의 열렬한 팬이다. 조성진의 팬이기도 하지만 그가 [라흐]를 연주한다기에 열일 제쳐두고 핀란드행을 택했다. 퓨쳐리즘과 모더니즘의 집합체인 듯한 비정형의 홀에서 내가 사모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연주된다. 피아니스트는 조성진. 그의 해석을 좋아한다. 그러나 헬싱키 오케의 스타일을 알 수 없기에 살짝 불안한 감은 있었다. 사실 오케 공연 현장 감상은 처음이라 기대가 컸다. 연주가 시작됐고 큰 파도를 치며 끝이 났다. 실망스러웠다. 조성진은 훌륭하게 연주를 했고 오케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아쉬운 건 피아노의 소리가 오케에 묻혀버려 끌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평소 음반이나 유툽으로 들을 때는 피아노가 주도하고 오케가 그를 받쳐주려 존재하는 것 같았다. 피아노의 음이 선명하게 클라이막스에서도 잘 들리기 때문이다. 후속으로 음향편집된 영상이라 그런 것일까? 유툽은 조작된 허상이고 내가 현장에서 느낀 것이 라이브의 특성인 걸까? 어마어마한 감동을 받고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실망감을 느꼈다. 정말 의외였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무대 뒤쪽에 자리해서였을까? 내년 런던에서 열리는 조성진의 라흐 피협 3번 공연과 브뤼셀에서 열릴 루간스키의 라흐 피협 1번 공연에서 다시 확인을 해봐야겠다.


2018 B